씨랜드 화재사건 분노 재조명 총정리
📌✅씨랜드 화재 참사사건'이 재조명되며 분노를 일으켰습니다.
9일 방송된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는 '마지막 여름캠프 : 씨랜드 화재 참사'라는 제목으로 씨랜드청소년수련원화재사건을 다루었습니다.
씨랜드청소년수련원화재사건은 1999년 6월 30일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백미리에 있던 '씨랜드'에서 화재가 발생해 유치원생 19명과 인솔교사 및 강사 4명 등 23명이 숨지고 5명이 부상을 당하게된 사건이었는데요.
1999년 6월 29일, 7살 세라가 다니는 유치원은 1박 2일 일정으로 서해안의 한 수련원으로 여름 캠프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다음날 새벽, 세라가 간 수련원인 '씨랜드'에서 화재가 발생을 했다는 소식을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비규환이 된 수련원 숙소엔 무려 550명의 사람들이 있었고, 대부분은 세라 또래의 5~7세 아이들이었다고 합니다.
화재 진압 후, 잿더미로 변해버린 숙소 건물에서 시신들이 하나, 둘 발견이 되었는데요. 아이들은 끝내 건물을 빠져나오지 못했고 유족들은 종잇장처럼 구겨진 건물 앞에서 망연자실 할 말을 잃게 되었습니다.
작동하지 않은 화재경보기와 소화기, 신고 후 20분이 지나서야 도착한 소방차와 수많은 퍼즐의 조각들이 참사를 그려내고 있었는데요. 그리고 그날 희생된 아이들 곁에 선생님이 없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유족들의 슬픔은 분노가 되었습니다.
사건 직후 구속된 씨랜드 원장은 돈을 아끼기 위해 이러한 구조를 사용했다고 했고, 또 씨랜드의 건축허가서와 설계도면은 모두 가짜였고 군청에서는 현장 확인도 하지 않고 건축을 허가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분노를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씨랜드 사건 전말
씨랜드는 1층은 사용하지 않고 2, 3층만 객실로 사용하던 씨랜드는 가운데 긴 복도를 두고 양쪽으로 총 26개의 방이 있던 구조였으며 밤 9시가 넘어 방으로 온 아이들은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그런 상황에 화재가 발생한 상황이었는데. 화재를 가장 먼저 감지한 것은 이날 사전 답사 차 방문한 태권도 도장의 송영규 관장님이었다. 그는 새벽 1시 집으로 돌아가려 일어섰다가 이상을 느끼게 되었고. 방문을 열고 나오니 형광등 주위에 하얀 연기가 지나갔던 것. 그리고 복도를 보니 3층 복도 전체가 이미 연기가 자욱한 상황이었습니다.
본능적으로 화재를 직감한 송 관장은 화재경보기를 눌렀지만 화재 경보기는 작동이 되질 않았습니다. 이에 그는 급히 불이야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게 되었고 그러자 방에서 자고 있던 선생님들이 밖으로 뛰쳐 나왔습니다. 그리고 송 관장과 선생님들은 급히 아이들을 대피를 시켰습니다.
한시가 급한 상황에 어떻게든 아이들을 깨워 밖으로 나가야 하는사오항에 그 순간 정전까지 되며 아비규환이 될수밖에 없었습니다. 송 관장을 비롯한 선생님들을 아이들을 억지로 깨워서 밖으로 데리고 나갔습니다. 어둠 속에서 아이들이 길을 찾지 못하자 송 관장의 아내는 박수를 치며 아이들의 길을 안내하며 아이들을 데리고 나갔습니다.
급하게 대피를 하던 그 순간 연기는 이미 2층까지 휘덮여 있었고, 그 사이 송 관장은 불길이 시작된 곳을 찾게 되었습니다. 불길이 시작된 곳은 바로 301호. 301호의 방문을 열자 시커먼 연기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에 송 관장은 화재 진압을 위해 소화기를 작동시켰지만 소화기도 작동이 되질 않았다고 합니다.
계속해서 치솟는 불길과 유독가스. 그 상황에 송 관장은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 소리를 지르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302호에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르게 되었고, 무조건 아이를 살려야 된다는 생각에 그는 아이들을 깨우고 미쳐 일어나지 못한 아이들은 들쳐 메고 밖으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도와 다른 어른들도 아이들의 구조에 나서게 되었으며, 그렇게 302호 아이들은 전원 구조에 성공을 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아이를 안고 건물을 빠져나오는 순간 바깥쪽에서 전선이 터지며 건물 전체로 불길이 번졌다고 합니다.
화재를 목격한 지 20분 만에 전소에 가까운 정도의 상태가 된 씨랜드. 불길이 옮겨 붙는 속도가 빨라도 너무 빨랐고, 하지만 아직까지도 소방차는 도착하지 않았다. 화재 시 골든아워는 접수 2분에 출동 5분으로 7분, 하지만 신고를 한 지 20분이 지나서 소방차 한 대가 겨우 도착을 했으며, 그리고 이어 많은 소방차가 도착했으나 이미 사태를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새벽 4시 화재가 진압되고 본격적인 수색 작업이 시작되었는데. 2층에서 발견된 시신은 223호의 출입구 근처에서 발견이 되었습니다. 작은 몸집의 시신은 바로 부천의 한 유치원 원생 74명 중 유일하게 구조되지 못한 혜지. 당시 혜지의 선생님은 분명히 혜지를 깨워서 데리고 나왔으나 인원 파악을 할 때 보니 아이를 찾을수 없다고 했습니다.
3층은 불길이 시작된 곳이라 2층과는 상황이 달랐다. 곳곳에서 시신이 추가로 발견된 것. 318호에서 1명, 306호에서 3명. 이들은 초등학교 교사와 씨랜드 아르바이트생으로 아이들을 구조하다 안타깝게 숨진 어른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불길이 시작된 301호에는 아직도 연기가 가득해쏙, 그리고 소방관은 창문 아래쪽에 뭔가가 잔뜩 모여 있는 모습을 보고 충격적 이었다고 하는데 잿더미와 뒤엉킨 불에 탄 시신들은 몇 명인지 육안으로 확인 할수조차 없었다고 합니다. 이 시신은 바로 소망유치원의 7살 해님반 아이들, 세라네 반 아이들이었다고 합니다.
씨랜드 사건 유족의 눈물
씨랜드 사건의 유족에 해당하시는 분들이 유치원생 19명을 포함해 23명이 희생된 씨랜드 화재 참사 유가족이 어린 딸을 잃은 참담한 심정을 털어 놓았습니다.
9일 오후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에서는 1999년 놀이공원 씨랜드의 청소년 수련원에서 발생한 화재 사건에 대해서 다시 재조명 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1999년 6월 30일 새벽 딸 세라를 수련회에 보내고, 집에서 자고 있던 이상학씨는 막내 처제의 연락에 TV를 켰다가 화마에 휩싸인 건물 한채를 보게되었고, 전날 세라가 생애 첫 수련회를 떠난 그 건물이었습니다.
이날 건물에는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가 발생해서, 유치원생 19명과 인솔교사 및 강사 4명 등 23명이 숨지고 5명이 부상을 입게 되었는데요. 불은 수련원 2층 C동 301호에서 시작돼 20분 만에 건물 전체로 옮겨붙은 것이었고, 화재경보기와 소화기는 작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301호에는 소망유치원 7살 햇님반 아이들이 있었는데, 여기에는 이상학씨의 딸 세라도 있었습니다. 이씨는 사망자 명단에서 세라의 이름을 발견하고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으로 달려가 세라의 시신을 보려고 했고, 하지만, 국과수 측은 "딸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라며 그에게 시신 공개를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씨는 딸의 시신을 확인하기로 했고 한눈에 딸을 알아볼수 있었는데 세라의 다리에 붙어 있는 '세일러문 스티커' 로 딸을 알아봤다고 합니다.
이씨는 "사망자 명단에서 세라의 이름을 봤을 때는 뭔가 잘못됐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때는 막 하늘이 무너지고, 뭘 어떻게 해야 될지 진짜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며 "아이가 다쳤어도 살아만 있어라 이건 현실이 아닐 거다. 우리 아이만 보게 해달라고 진짜 빌었다"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에 참사를 전하던 장도연은 "너무 미안하다. 말하기가 너무 미안해"라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이야기를 듣던 가수 비비, 백지영, 타블로도 말을 잇지 못하며 눈시울을 붉힐수 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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